김치 한 포기를 꺼내는 순간, 붉은
빛이 먼저 말을 건넨다.
노을이 항아리 속으로 스며든 듯하고, 바람이 고춧가루를 입고 내려앉은 듯하다.
코끝에 닿는 마늘 향은 겨울 들녘의 숨결 같고, 젓갈의 깊은 내음은
먼 바다 파도가 조용히 밀려오는
소리 같다.
전라도 김치는 음식이 아니라,
시간이 천천히 익혀낸 한 편의 이야기다.
겨울 김장날이면 마당은 작은 축제였다. 김이 오르는 배추는
눈 덮인 산처럼 포근했고, 어머니의 손은 쉼 없이 붉은 양념을 버무렸다.
고춧가루는 첫눈처럼 흩날리고, 새우젓과 멸치젓은 바다를 한 국자씩 퍼 담은 듯했다.
양념을 아끼지 않는 손길은 마치 사랑을 헤아릴 수 없듯 넉넉했다.
그래서 전라도 김치는 한입 베어
물면 남도 바다 물결처럼 힘차게 밀려오고, 장단처럼 고르게 이어지는 맛의 운율을 가진다.
매콤함은 혀끝에서 춤을 추고, 짭조름한 깊이는 오래된 시간처럼 천천히 스며든다. 그 맛은 단순한 음식의 자극이 아니라, 사람을 불러 모으고 밥상을 둥글게 만드는 정의 리듬이다.
넓은 호남 들판에서 자란 배추와
무는 햇살을 머금어 단맛을 품고, 바다는 젓갈로 깊이를 더한다.
막 담근 김치는 봄바람처럼 싱그럽고, 익어가는 김치는 여름 장맛비처럼 진해지며, 묵은지는 가을 들녘처럼 깊고 고요하다.
김치는 계절을 따라 숨 쉬고, 사람의 삶처럼 천천히 익어간다.
무엇보다 김치의 비밀은 손끝에 있다. 계량컵 대신 눈대중, 레시피 대신 세월이 간을 맞춘다. 이웃과 웃으며 나누던 김장 품앗이 속에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양념처럼 섞였고,
그래서 전라도 김치에는 늘 사람의 온기가 따라붙는다.
한 점 집어 먹으면 밥상이 아니라
고향 마루에 앉아 있는 듯 마음이 따뜻해진다.
비록 전라도 내 고향을 떠나 도심에 살지만, 끼니때가 되면 어린 날 어머니가 담가 손으로 쭉 찢어 밥숟가락 위에 조심스레 올려주던 김치가 문득 떠오른다.
밥보다 먼저 건네던 그 붉은 정,
입안에 퍼지던 따뜻한 사랑의 맛.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그 이름, 바로 전라도 김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