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산 아래로
산자락을 휘어감듯 기찻길 하나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검은 무쇠 철로는 논과 밭, 개울을
건너 구불구불 들녘을 헤집으며
마을과 읍내, 그리고 산너머
이름 모를 먼 세상까지 이어지는
한 줄 운명처럼 누워 있었다.
동트기 전 간이역을 지나며 울리던 기차의 경적은 검은 어둠의 등을 밀어내듯 들판 위로 길게 번져갔다.
산자락 아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마을은 그 기적 소리에 하나둘 눈을 떴고, 새벽이면 물안개는 논바닥
위에 엎드린 채 아직 덜 깬 들녘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었다.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새벽하늘로 가늘게 피어오르고,
외양간 소 울음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고요한 농촌 아침을 흔들어 깨우면,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책보를 둘러메고 신작로를 따라 걸어 학교로 향했다.
한낮이 되면
마을 어귀 늙은 정자나무에서는
매미들이 목이 터져라 여름을 울어댔고, 논두렁 사이로는 더운 흙냄새와 물비린내가 뒤섞여 올라왔다.
들에서는 새참을 이고 가는 아낙들의 발걸음이 오갔고, 소달구지 바퀴 소리는 흙길 위를 느릿느릿 세월처럼 지나갔다.
입암산 아래를 길게 지나던 철길 위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해질녘 무렵이면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기적 소리가 들려오면 동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철길 쪽으로 달려갔다.
먼 동네 산그림자를 등에 업고 달려온 검푸른 열차는 긴 객차를 매단 채
입암산 아래를 감아도는 검은 띠처럼
덜컹거리며 들판 사이를 지나갔다.
기차가 가까워질수록
땅은 먼저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발밑 흙길이 미세하게 떨리고
철길 아래 자갈들이 잘게 몸을 흔들면
아이들은 숨조차 죽인 채 철로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거대한 열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순간이면 들판의 공기마저 출렁이는 듯했다.
쇠바퀴와 철로가 맞부딪히며
터뜨리는 쇳소리는 마치 천둥 한 덩이가 땅 위를 달리는 것 같았고,
검푸른 객차는 바람을 몰고 와 논두렁 풀잎까지 세차게 흔들어 놓았다.
전기줄 위에 앉아 있던 참새들은
놀란 듯 한꺼번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작은 날갯짓은 마치 하늘 위에 검은 콩알을 흩뿌려 놓은 듯했고, 아이들은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세상 가장 큰 구경이라도 난 듯 까르르 웃곤 했다.
기차가 지나간 뒤에도
철로에는 한동안 떨림이 남아 있었다.
멀어져가는 덜컹거림은 입암산
자락을 타고 길게 메아리쳤고,
들판 위 바람까지 조금 전 지나간 열차의 숨결을 품고 있는 듯했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철길 위를 걷곤 했다.
침목 하나를 건너 또 하나를 밟으며
두 팔 벌려 중심을 잡고 걷는 길은
놀이이자 작은 모험이었다.
잘못 디디면 자갈밭에 발이 빠졌지만
그래도 철길은 늘 우리들의 놀이터였고, 세상으로 이어진 긴 상상의 길이었다.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면
아이들 마음은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호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어도
읍내 장터를 구경 간다는 것만으로 가슴은 콩닥거렸다.
신작로 대신 철길을 따라
이십리 길을 걸어가며 웃고 떠들다 보면 먼 길도 금세 짧아졌고,
발걸음마다 설렘이 따라붙었다.
장터에 들어서면
튀밥 기계가 내는 굉음에 아이들은 놀라 두 귀를 틀어막았고, 잠시 뒤 허공으로 눈처럼 흩어지는 튀밥 냄새에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엿장수 가위 소리는 골목마다 철커덕거리며 울려 퍼졌고,
좌판마다 쌓인 참외와 사과,
비릿한 생선 냄새와 국밥 끓는 김이 뒤섞여 읍내장은 살아 있는 거대한 숨결처럼 꿈틀거렸다.
산모퉁이를 돌아 기차가 나타나면
아이들은 철길 옆에 몰려가 손을 흔들었다.
객차 창문 밖으로 누군가 던져주던 사탕과 껌, 가끔 날아오던 건빵
몇 알은 시골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먼지 묻은 손으로 그것들을
주워 들고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 웃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맛 속에는
가난한 농촌에서는 맡을 수 없던
낯선 도시의 냄새와 꿈 같은 세상이
함께 녹아 있는 듯했다.
때로는 친구들과 철로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멀리서 기차가 오기를 숨죽여 기다리기도 했다.
땅이 먼저 울리고 철길이 낮게 떨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귀를 막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았다.
마침내 괴물 같은 열차가 천둥처럼 지나가고 나면 철로 위에는 납작하게 눌린 못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전리품처럼 주워
숫돌에 갈고 또 갈았다.
칼이 되기도 하고 창이 되기도 했던
그 못은 가난했던 시절 속에서도
아이들 상상력을 키워주던 작은 장난감이자 보물이었다.
해 질 무렵이면
붉게 물든 들판 사이로 기차는 마지막 기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논둑길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고,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는
마을 위로 천천히 번져갔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간이역도 사라지고 철길 주변 풍경도 변했지만, 입암산 아래로 길게 이어져 있던 그 기찻길과 침목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던 어린 날의 발걸음은 지금도 마음속 어디선가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돌아보면
내 유년은 기차보다 빠르게 달려간 것이 아니라, 그 철길 곁을 따라
천천히 흔들리며 자라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52회 원하부 서건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