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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아,

아빠는 오늘도 너의 이름을 마음속에서 조용히 불러본다.봄이 오기 전 얼어 있던 땅속에서 새싹이 스스로 길을 찾아 올라오듯, 너의 사랑도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단단히 뿌리내리며 자라가길 바란다.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순간보다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오래 서로를 비춰주는 마음이 더 소중하단다.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서로의 곁에서작은 손 하나 놓지 않는 사람이 되거라.말 한마디는 꽃이 되기도 하고 칼날이 되기도 한다.그러니 화가 나는 날에도가시 대신 꽃잎 같은 말을 건네고, 서운한 밤이 오더라도 등 돌리기보다 한 걸음 먼저 다가가는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사랑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서로 져 주며 함께 걷는 길이다.강물이 돌을 만나 돌아가듯,때로는 양보하고 때로는 기다리며 둘만의 시간을 천천히 ..

카테고리 없음 2026.02.27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지아비를 일찍 여의고새벽별보다 먼저 일어나달빛보다 늦게 잠들던 사람,우리의 어머니.세월은 당신의 어깨에바람을 얹고 지나갔고,눈물은 말 대신 등 뒤로 흘러한 줄기 강이 되었습니다.자식의 이름을 기도처럼 불러가며당신은 자신의 청춘을 장작처럼 태워아이의 길에 불을 밝혔지요.천륜의 인연이란칼로도 끊지 못하고시간으로도 닳지 않아끝내 노래가 되어 가슴 속에서울림으로 남는 것.또 하나의 사랑은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을 향한끝나지 않는 그리움.그 사랑을 지키는 길은 눈물로 제사를 지내는 일이 아니라그의 숨결이 남아 있는자식을 더 다정히, 더 단단히사랑으로 보살피는 일.아이의 웃음 속에당신의 얼굴을 띄우고,아이의 걸음 속에 당신의 등을 세우며 어머니는 오늘도사랑을 이어 걷습니다.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빈 자리에 남은 것은 ..

카테고리 없음 2026.02.26

명절이라는 거울 앞에서

명절이 다가오면집집마다 냄비보다 먼저마음이 끓는다.평소에는 배달앱이 밥을 짓고카드 영수증이 반찬값을 대신하지만,명절이 오면 ‘정성’이라는 두 글자가무거운 놋그릇처럼 식탁 한가운데 놓인다.기름은 튀고손목은 시큰거리며입에서는 한숨이 김처럼 오른다.“왜 늘 이렇게 힘들까.”그 푸념은 부엌 천장에 맺혔다가다시 마음으로 떨어진다.사치는 꼭 비단옷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시간을 아끼지 않는 마음의 사치, 서로의 수고를 외면하는 태도의 사치도 있다.게으름 또한 이불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마음을 먼저 접어버리는 것이어쩌면 더 깊은 게으름일지 모른다.그러나 거울은 한쪽 얼굴만 비추지 않는다.남편은 얼마나 국자를 들었는가.말로만 “고생 많다” 하지 않았는가.명절 증후군은 여자만의 것도, 남자만의 것도 아닌 서로의 기대..

카테고리 없음 2026.02.25

전라도 김치의 맛

김치 한 포기를 꺼내는 순간, 붉은 빛이 먼저 말을 건넨다.노을이 항아리 속으로 스며든 듯하고, 바람이 고춧가루를 입고 내려앉은 듯하다. 코끝에 닿는 마늘 향은 겨울 들녘의 숨결 같고, 젓갈의 깊은 내음은 먼 바다 파도가 조용히 밀려오는 소리 같다. 전라도 김치는 음식이 아니라, 시간이 천천히 익혀낸 한 편의 이야기다.겨울 김장날이면 마당은 작은 축제였다. 김이 오르는 배추는 눈 덮인 산처럼 포근했고, 어머니의 손은 쉼 없이 붉은 양념을 버무렸다.고춧가루는 첫눈처럼 흩날리고, 새우젓과 멸치젓은 바다를 한 국자씩 퍼 담은 듯했다.양념을 아끼지 않는 손길은 마치 사랑을 헤아릴 수 없듯 넉넉했다.그래서 전라도 김치는 한입 베어 물면 남도 바다 물결처럼 힘차게 밀려오고, 장단처럼 고르게 이어지는 맛의 운율을 가..

카테고리 없음 2026.02.24

2월 끝자락, 봄을 부르는 날

아직은 이월의 끝자락,겨울이 자리를 완전히 비켜주지 못한 시간이다.찬 기운은 골목 모퉁이에 남아 있고,햇살만 먼저 봄처럼 다가와 어깨를 두드린다.마치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우듯,계절은 조용히 세상을 흔들어 놓는다.앙상한 나뭇가지 끝마다보이지 않는 숨결이 맺혀 있다.꽃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꽃의 생각이 먼저 피어나고,연둣빛은 씨앗 속에서작은 심장처럼 고동치고 있다.얼어 있던 흙은 서서히 풀려긴 한숨을 내쉬듯 김을 올리고,그 틈 사이로 초록 싹 하나가조심스레 세상을 엿본다.겨울을 밀어낸 힘은 크지 않지만,그 작은 밀어올림이 계절을 바꾼다.어디선가 벌 한 마리봄을 착각한 듯 허공을 맴돌고,새들의 울음은 짧던 음을 늘려마치 봄 연습을 하는 합창처럼 들린다.아직 꽃밭은 비어 있지만세상은 이미 봄의 리허설 중이다.이월..

카테고리 없음 2026.02.21

기다림이 머무는 집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부모가 있다는 사실은 마음 한켠에 켜 놓은 작은 등불과도 같다.세월이 흐르며 몸은 늙어가고기억은 흐릿해져도, 부모가 살아 계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삶은 조금 덜 쓸쓸해진다.부모는 늘 그 자리에 서 있는고향의 산과도 같다.멀리 떠나 있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믿음으로 사람은 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형제간의 정은 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와 닮아 있다.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고 서로 다른 하늘을 향해 흔들려도, 부모라는 줄기가 살아 있을 때 가지들은 같은 바람을 느낀다.부모가 계실 때 형제의 웃음은 더 부드럽고, 서운함도 금세 녹아내린다.부모는 말없이 형제를 이어주는보이지 않는 뿌리이기 때문이다.나는 어린 날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냈다.기억 속 아버지는 새벽 안개처럼잡히지 않으면서도 늘..

카테고리 없음 2026.02.15

발렌타인데이

겨울의 숨결이 아직 창가에 머물고,바람은 유리창에 서리를 새기며계절의 끝자락을 천천히 넘긴다.그 틈 사이로, 사랑은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처럼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고개를 든다.발렌타인데이는달빛을 머금은 작은 별 하나가가슴 속 호수에 떨어지는 날.말로 다 하지 못한 마음들이초콜릿의 달콤한 향기로 녹아손끝에서 손끝으로 따뜻한 물결처럼 번져간다.사람의 마음은 때로겨울 들판에 쌓인 눈과 같아서차갑고 고요해 보이지만,그 속에는 봄을 품은 씨앗들이숨죽여 잠들어 있다.사랑이라는 햇살이 스치면그 씨앗들은 어느새 연둣빛 떨림으로 깨어난다.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은어둠 속에 등불 하나 켜는 일,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는 것은마른 나뭇가지 끝에 첫 새순을 달아주는 일.사랑은 폭죽처럼 요란하지 않아도장작불처럼 오래 타..

카테고리 없음 2026.02.14

꽃처럼 기다리며

화창한 하늘이겨울의 어깨를 밀어내고 있다.바람 끝은 아직 서늘하지만햇살은 먼저 와 마음의 창을 두드린다.투명한 빛 한 줌이얼어 있던 생각 위에 내려앉아조용히 숨을 불어넣는다.땅은 아무 말이 없다.그러나 그 속에서는 수많은 씨앗이어둠을 이불 삼아 봄을 연습하고 있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둣빛은 피를 돌리고, 나무는 마른 가지 끝에작은 심장을 매달아 둔다.툭, 하고 터질 순간을 기다리며고요 속에 힘을 모은다.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다.겨울을 건너는 가장 단단한 방법.눈 속에 묻혀도 뿌리는 포기하지 않고, 찬 서리 속에서도 속살은 몰래 물을 올린다.봄은 늘소리 없이 오지만 분명하게 다가온다.어느 날 문득들판이 숨을 틔우고골목 끝에서 향기 하나가 먼저 돌아보는 순간. 그때 알게 된다.긴 침묵도결국은 꽃을 위한 시간..

카테고리 없음 2026.02.12

밥상이라는 자리.

오늘 따라 밥이 질다.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말이 먼저 풀어진다.진밥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밥알 사이에 엉겨 붙은 하루를 먼저 씹는다.아내는 밥상보다 교회 문을 더 자주 연다.밥솥의 김은 낮지만 신방과 선교의 이야기는 늘 위로 오른다.우리 집 김치는 교회 자매들의 손을 빌려 담근다.부엌보다 예배당이 가깝고손맛보다 나눔의 시간이 먼저 익는다.냉장고 안에는 집안의 역사보다공동체의 체온이 쌓여 있다.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된장찌개 끓는 소리로 집의 안부를 배웠고청국장 냄새로 계절이 돌아왔음을 알았다.그러나 이 집에서 그런 맛을 기다리는 일은 비 오는 날 마른 불씨를 찾는 일과 같다.밥상 위에는 바람에도 흩어질 듯한 김. 기름에 잠긴 붉은 햄. 그리고 김치국인지 김치찌개인지 자기 이름을 잃은 국. 그 국을 바라보..

카테고리 없음 2026.02.12

혈육(血肉)

혈육은 피의 육신이다.피 혈(血), 살육(肉).몸속을 도는 붉은 강과 그 강을 품은 살의 언덕이태어날 때부터 한 방향으로 흐르는 인연이다.아버지와 자식은손을 잡아 맺은 사이가 아니고,형제는 약속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다.숨이 먼저 닿고심장이 먼저 알아보는하늘의 순서, 천륜(天倫)이다.천륜은칼로 자를 수 없고말로 끊을 수도 없다.하늘이 매어 놓은 매듭은 사람의 손아귀로 풀리지 않는다.억지로 당길수록 매듭은 더 깊이 살 속으로파고든다.그러니 여성들이여,지아비가 비록 못나고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그 미움으로 혈육의 연을 재단하지 말라.부부의 인연은 바람처럼 오고 가도, 피로 이어진 연은뿌리처럼 땅속에서 자란다.천륜을 갈라치기 하는 일은한 사람을 벌하는 일이 아니라천지(天地)의 숨결을 거스르는 일이다.하..

카테고리 없음 2026.01.30